2009년 겨울, 중국 광주 및 베트남 답사 보고 : 호찌민과 인민전쟁 사상
※ 이 글은 답사 보고서로 쓰여진 글입니다.


난 예전부터 세계 각 국가들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었지만, 베트남은 사실 매우 생소한 국가였다. 그 역사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었고,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오직 우리가 그런 것과 같은 분단의 비극을 겪었던 국가, 그리고 중국, 프랑스, 미국이라는 세계의 강대국을 모두 꺾고 분단을 극복해서 결국 독립을 쟁취한 나라라는 것뿐이었다. 그 사실 자체가 내게 베트남이란 국가를 경외의 대상으로 만들기는 하였으나, 그저 먼 존재일 뿐 그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본 적은 거의 없었다. 단지 미국에 대해 공부하면서 하나의 파편처럼 주워들은 지식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이번 여행에서야 비로소 그 국가의 모습을 일부나마 살펴보면서, 나는 이 국가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해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쨌건 내가 이 국가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베트남 전쟁 뿐이었고, 지식이란 것이 본래 가지고 있던 지식에서 점층적으로 쌓여나가는 것이기 때문인지 내 관심도 베트남 전쟁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 말도 안 되는 전력 차를 극복하고, 어떻게 그 강대국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을까? 내 최대의 관심사는 바로 그것이었다.

난 그전까지 베트남 전쟁에 대해 게릴라 전술이라는 이야기, 땅굴을 팠다는 이야기 등 단편적인 이야기만을 들어왔다. 하지만 구찌 땅굴 체험에서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들, 전쟁박물관에서 봤던 여러 가지 모습들은 내게 대단하다기보다는 기이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화력의 열세까지야 차라리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군사학 상의 일반적인 논의에서 살펴볼 때, 체계화된 군대가 체계화되지 않은 군대보다 강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서구의 군대가 훨씬 강력했고, 심지어 이 체계화 측면에서는 내가 상상하던 그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호찌민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이 있었지만, 그는 단순히 상징일 뿐이었고 당시 베트남 지역 내의 국지전을 주도하던 이들에게 특별한 명령 하달 등의 연락 체계를 갖추고 있지도 못했다. 당시 베트콩의 모든 부대들은 어떻게 보면 독립된 하나하나의 소규모 병력들에 가까웠으며, 오직 보응웬지압이 이끄는 북베트남 군만이 호찌민의 지휘 하에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 정도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의병들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의병이란 기본적으로 지방 호족들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적어도 기존까지 지속되었던 왕정 국가의 혈통적 정통성을 지닌 이씨 왕조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호찌민은 그런 정통성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 정통성이 특별히 존재하지 않는다면, 전쟁에서 이겨서 미국을 몰아냈다 하더라도 기존의 게릴라 군들이 군벌 등의 형태로 새롭게 형성되어 재차 내전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베트남의 내전은 남베트남이 소멸되면서 종식되었고, 이러한 문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더더구나 통일은 그 정신적 지도자라는 호찌민조차 사망한 이후에 이뤄졌다. 이 고요함은 뭔가 기이할 정도이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놀라웠던 것은 그들이 하나의 정점, 즉 호찌민이라는 이름에 아직까지도 종교에 가까운 상징성을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마오쩌둥, 김일성, 레닌 등 수많은 과거 공산권들의 지도자들이 그런 강력한 신화로 기록되었었고, 심지어 자본주의 진영에서도 미국의 워싱턴이나 링컨, 프랑스의 드골 같은 인물들이 일종의 신화처럼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박정희는 수많은 논란에 휩싸여있지만, 여전히 상당 부분 신화적 존재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호찌민이란 이름은 이 속에서 약간은 색다른 느낌이 있다.
자본주의 진영의 영웅들이야 대부분 위인 정도의 인식이며 현실 사회 자체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다고 치자. 또한 공산주의 진영의 영웅들은 상당한 수위의 신화화 과정을 거쳤으니 그렇게 신봉하는 것도 그럴 수 있겠다 생각하자. 하지만 다른 영웅들과는 달리, 호찌민은 왠지 베트남 사회에서 우리가 볼 때는 영웅 같지 않은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지나칠 정도로 서민적이고 조용한 이미지로, 마오쩌둥이나 김정일 등에서 느껴지는 권위적 이미지를 풍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에 대한 호칭부터가 그렇다. 베트남인들은 지금까지도 그를 ‘호 아저씨’라는 뜻의 ‘박 호(Bac Ho)’라는 친근한 표현으로 호칭하고 있다. 심지어 아직까지도 그들은 어떤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호 아저씨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에게 호찌민은 그들이 떠받들어야 하는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을 보살펴주는 수호천사와 같은 이미지인 것이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이것이 신화화 과정 이전부터 상당 부분 베트남 전체에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은 베트남 전쟁기간 중 주월 한국군 사령부에서 타자수로 일했던 남베트남의 유복한 가정 출신 여성들이 스스럼없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호찌민을 꼽고 있었다고 말했다. 적국의 국민들조차, 그것도 유복한 가정 출신임에도 그런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여행 당시 가이드 분의 말에 따르면, 호찌민 사망 당시 남베트남 내에서조차 그를 추모하는 이들이 수도 없었고 경찰들조차 알고서도 조용히 넘어갔다고 한다. 아직 통일되기도 전에 그랬다는 것은 단순히 신화화 과정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심지어 이는 외국에까지 이르는 인식이었다. 「Time」지는 호찌민이 사망하자, 그에 대해 “그들은 애정 어린 마음으로 ‘Ho 아저씨’를 이해했다. 남베트남인들도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현재 살아 있는 민족지도자 가운데 다른 민족의 총구 앞에서 그만큼 꿋꿋하게 오랫동안 버텼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평가했다. 타 국가들, 심지어 적국조차도 인정할 정도로 호찌민이란 인물은 베트남이란 국가와 민족 전체의 가장 사랑받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화화 과정은 단순히 그러한 현상을 유지시킨 수준에 불과했고, 이미 그는 베트남 국민 전체에게 가장 추앙받는 존재로 각인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현 시대에조차, 베트남에서 만났던 친구 하이 하는 호찌민 영묘에서 엄청난 감동에 휩싸였다고 말했다. 자본주의가 유입되고 있는 시대의 젊은 층, 그것도 한국에서 1년간 공부하며 다른 문화를 접했던 이에게조차, 호찌민이란 이름이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현상, 즉 호찌민이 대국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아직까지도 위대한 이름으로 남아있을 수 있고 그가 죽었음에도 그의 후계자들이 전쟁 승리 이후 전체 국가를 성공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 전쟁에 임할 당시 호찌민이 내세웠던 독특한 사상 때문이 아닐까 한다. 호찌민은 기존 오랜 기간 중국의 침략에 대항해왔던 베트남 민족의 전쟁 수행방법을 ‘인민전쟁’이라고 이름 붙이고, 이를 사상적,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프랑스, 미국에 대한 베트남 민족의 항쟁을 지도했다고 한다.

인민전쟁의 가장 큰 특징은 어떠한 누군가에 의한 병력 지휘 형태를 띠는 일반적인 전쟁 형태가 아닌, 인민 각자에 의해 전쟁이 수행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약간은 무책임해 보이는 형태일 수도 있지만, 이는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할 당시 매우 효과적인 전략으로 작용하였다. 인민 각자가 모두 하나의 군인이기 때문에 병력 자체의 증대 효과를 꾀할 수 있으며, 전선이 확립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특정 지역을 공격하거나 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격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상대의 전투력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나타나며, 병력의 집중이 약화되는 것은 란체스터의 법칙에 의해 실질 전투력 자체의 감소를 야기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전술의 효과적인 측면은 적군이 어떤 특정한 목표를 지정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어디서 공격받을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을 조성함으로써 정신적 피로를 엄청나게 증폭시킬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이 전술은 그만큼 희생자를 대거 양산할 수 있다는 측면이 있다. 훈련되지 않은 병력이 대거 투입되는 것이며 병력이 게릴라전 양상으로 운용되는 만큼 상대국으로서는 이 병력들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해 게릴라들이 숨어들 수 있는 지역에 대한 폭격, 숲 등에 대한 대규모 파괴 등을 가할 수밖에 없다. 미선 유적과 후에 왕궁의 파괴, 대량의 제초제 살포에 따른 피해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민간인들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가 없으니, 이 과정에서 대규모 학살 사건들이 자행될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전략적인 요소뿐 아니라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병사들의 심리 상태 때문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다. 실제로 베트남전은 베트남 전 지역에 걸쳐 엄청난 희생자를 낳았으며, 여타 전쟁과 비교했을 때 민간인 희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전쟁이었다.

또한 인민전쟁 사상에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 게릴라 전술 이전에 그 근본을 ‘인민’이라는 대상에 두고 있다는 것에 있다. 사실 게릴라 전술은 인민전쟁 사상에서 유발되는 국지전 전술에 해당하는, 일종의 하위 개념에 해당할 뿐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민 개인에게 전쟁 수행을 요구하는 동시에 인민이라는 하나의 집합체를 구성한다는 것에 있다. 즉 인민전쟁 사상은 각각의 인민과 전체 인민을 동시에 포괄하는 사상으로, 이는 하나가 곧 전체이고 동시에 전체가 곧 하나가 되는 구성을 낳는다. 즉 이는 게릴라들이 개별적으로 분산된 게릴라일 뿐만이 아니라, 각각의 게릴라 집단들이 인민이라는 통일된 기지 아래 통합되어 있는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에 근거한 이상 군벌들의 형성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각 게릴라 집단은 별개의 집단처럼 움직이나 기본적으로 인민이라는 대상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들이 추앙해야 할 대상은 어떠한 한 개인이 아니라 인민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있게 된다. 심지어 호찌민이라는 인물조차도 이 사상을 전파하고 이끌어가는 한 선지자가 될 뿐, 어떤 절대적 우위의 존재는 아니게 된다. 즉 전 베트남은 인민이라는 추상적 대상을 위한 성전을 수행하는 이들이 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개별적으로 활동하지만 동시에 동일한 가치를 수행하기 위한 유기적 형태를 이뤄내는 것이다. 이 속에서 각 병력을 이끄는 개개인들은 단지 자신들 휘하의 병력을 이끌 뿐이므로, 그들이 단순한 개인인 이상 이들은 같은 성전을 수행하는 평등한 이들이며 그들이 숭상하는 절대적 가치보다 우선하여 존재할 수는 없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이 사상이 모두에게 공감이 가야 된다는 기본 전제가 필요하다. 여기서 호찌민은 현실적 문제를 내세운다. 그는 분명 공산주의 집단인 코민테른에 속해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가 1948년 6월 11일 국민들에게 보낸 호소문에서 제시한 목표들이나 1954년 프랑스를 몰아낸 이후 강조한 것들은 사회주의 체제나 사상과 같은 이념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중시했던 최초 목표는 베트남인들의 기아 문제에 대한 해방 조치들과 그를 위해 필요한 교육 차원에서의 문제들이었다. 그는 공산당과 정부의 역할 및 책임이 어떠한 이념적 논리를 세우는 것 이전에 국민들을 기아와 추위, 질병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실질적인 정책 또한 그렇게 수행되었다.

또한 그는 고통 받는 국민들을 위해 지도자가 먼저 검약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평생 어떤 재산을 소유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하의 당, 정부 관료들에게도 이를 따를 것을 요구했다. 대통령궁이 있었음에도 그 옆에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았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그것이 어쩌면 국민을 하나로 끌어 모으기 위한 하나의 쇼맨십에 불과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이러한 모습이 국민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었는가가 중요하다.

종교적, 또는 민족적 신념은 강력한 단결력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을 세우고 그것이 대중의 호응을 받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제공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이는 실질적으로 제공될 수 있는가의 문제보다도, 제공될 거라고 대중이 기대하는가의 문제이다. 십자군 전쟁 시기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이 서로에 대항하여 그토록 치열한 전투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사실 뒤에서 정치적으로 어떤 복잡한 상황들이 전개되었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 종교들이 내세에 대한 일종의 확신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것이 실제로 그런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기에 이러한 힘이 성립되는 것이다.

호찌민의 인민전쟁 사상도 이와 동일하다. 동시에 이는 호찌민이라는 개인이 솔선수범하는 자세는, 저들이 정말로 그것을 이루려 노력하고 있고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이러한 측면이 베트남 국민들의 전폭적인 호응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나 그 제시된 바가 현실적 측면에서의 문제였고, 그 문제가 무엇보다 절실했던 베트남 국민들에게 그들의 말이 훨씬 큰 영향력으로 다가왔을 것은 자명하다. 반면 당시 사이공 정부에서는 남북의 대결에서 단순히 반공주의 논법만을 계속 강조하고 있었고, 그것은 국민들에게 어떠한 것을 안겨줄 것이라는 기대 심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다. 특히 지엠 정부는 베트남인들 대부분이 신봉하고 있던 불교에 대한 탄압, 자체적인 부패 등을 통한 기대감의 약화 등으로 계속 허점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호찌민의 사상이 유효했던 것은 사실 당연했다.

특히 호찌민은 이 인민전쟁 사상에서, 군사적 투쟁만이 아니라 정치적 투쟁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직접적인 선전 선동 활동은 물론 신문, 잡지, 전단 등을 통한 인쇄물, 방송 등을 통한 활동을 그는 지속적으로 전개했으며, 특히 청년 동맹이나 노동 조합 등이 이러한 투쟁을 선도해야 할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동시에 식자층, 즉 공무원이나 교사, 학생들이 이 과정에서 일반 민중의 정치적 투쟁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군사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 두 가지가 서로 공존하면서 일종의 상승효과를 낳을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그는 이 두 별개의 투쟁을 접목시키고자 했는데, 그는 도시 내의 정치적 투쟁이 동시에 군사적 게릴라 투쟁으로 전환, 상대 군이 안팎으로 공격에 시달리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러한 상황은 당시 프랑스군과 미군, 사이공 정부군 모두에게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호찌민이 전략적으로 성공한 가장 큰 까닭은, 그들의 전투를 장기전, 지구전으로 끌고 간 것이다. 특히 호찌민이 1946년 10월 프랑스의 언론인 다비드 생브랭과 나눈 인터뷰에서 말한 코끼리와 호랑이의 싸움에 대한 비유는 이러한 호찌민의 지구전 전략의 요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와 베트남의 전쟁은 코끼리와 호랑이의 싸움과 비슷하다. 어느 순간이던 호랑이가 멈추어선다면 거대한 몸집을 가진 코끼리는 상아로 호랑이의 옆구리를 뚫어버리거나 짓밟아버릴 것이다. 그러나 호랑이는 멈춰서지 않는다. 낮에는 정글 깊숙이 몸을 숨겼다가 밤이면 나타나서 코끼리의 등에 올라타 등을 죽죽 찢어놓고는 다시 어두운 정글로 사라져버린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다시 나타나 코끼리를 괴롭힌다.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계속 공격을 당한 코끼리는 서서히 힘이 빠지고 결국에는 출혈이 지속되어 죽어버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와 베트남의 전쟁이다.”

이 전술은 단순히 상대의 힘을 빼기 위한 전술이라는 것 이상의 의의가 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그들의 사상을 유지시키는 모체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전쟁의 과정에서 개별 전투의 승리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히 적군을 약화시켰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군사적 헤게모니를 빼앗아 전략상의 우위를 확보하며, 부대 전반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중요한 것이다. 동시에 어떠한 결정적 패배는 지도자에 대한 신뢰 자체를 저하, 부대를 사분오열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전쟁에 임한 이들은 어떻게든 승리를 취해야 하며, 그를 통해 외적 헤게모니는 물론 내적 헤게모니까지 장악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전, 지구전을 애초에 선포한 이상, 국지전의 승리 유무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어차피 버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괴롭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구정 공세에서 군사적으로 패배한 것은 분명 북베트남군이었지만, 그조차도 미국에게는 전환점이 되지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에게 승리한 것은 분명 값진 승리였지만, 졌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지 않았을까. 당시 호찌민의 전술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이러한 패배를 무용화시킬 수 있는, 오로지 장기전을 목적으로 삼았다는 측면이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 미국, 프랑스에 대항한 호찌민의 전략이 강력했던 것은, 호랑이가 한 마리가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수많은 호랑이들이 기회만 기다리며 정글 속에 대기하고 있는 형국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호랑이 한 마리를 밟아 죽였다고 코끼리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호랑이가 다시금 달려들어서 또 상처를 입히고 도망가는 것이다. 한 호랑이가 다쳤으면 그 호랑이는 정글에서 몸을 치료하고, 그 사이 또 다른 호랑이가 다시 또 공격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의 호랑이가 다쳤는가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코끼리를 죽일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호랑이들이 서로 몸을 사리지 않고 덤벼들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바로 인민전쟁 사상이라는, 종교적 신념에 가까웠으며 당시 남북을 가리지 않고 국민들 모두가 따랐던 그의 사상이었다.





뭔가 보고서지만 형식 같은 거 다 무시해버린 글. 서론도 결론도 없고 그냥 통글로 써버렸다.

뭐, 그러려니. 풋;;


여튼 쓰면서 느낀 건데, 적어도 베트남은 그 국부가 된 인물에 대해서는 어느 국가보다 축복받은 이들이 아닐까.




포르 에 몬테 프로푸고.

라시엘.
by 라시엘 | 2009/01/31 16:41 | Sp. in Culture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rasiel37.egloos.com/tb/2260675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yuriel at 2009/02/02 23:39
여러모로 베트남은 흥미로운 나라라는 느낌이'ㅅ' 그리고 저 호치민에 대해서 한국에서 갖는 감정을 생각해보면 또 여러모로 흥미롭지요. ...베트남 전에 대해서라면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서도-_-;
Commented by 라시엘 at 2009/02/07 12:16
ㅋㅋㅋㅋㅋ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