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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수업간 들었던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당시 수업을 담당하신 선생님의 생각과 제 자의적인 생각이 혼합된 글임을 밝힙니다. 특히 강의를 토대로 하며 필기과정을 통해 왜곡될 수 있기에, 인물 및 사건, 작품명 등에 있어서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Ⅰ. 범람기 : 게르만 족들의 난입 1, 동고트 왕국 A. 테오도릭 대왕 476, 로마가 멸망하고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왕을 자칭했을 당시, 주변국의 여타할 움직임은 존재하지 않았다.사실 당시 서로마의 세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고 황제들 또한 허수아비로 옹립되는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단지 황제가 라틴인에서 게르만인으로 바뀐 것 말고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서로마의 멸망에 대해 그나마 책임을 가지고 있던 동로마, 비잔틴 제국조차도 초기에는 그리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했고, 오히려 오도아케르의 즉위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비잔틴 제국은 오도아케르가 멸망시킬 당시 황제였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이는 본래 비잔틴 제국이 임명한 황제는 전대 황제였던 율리우스 네포스였고,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또다른 용병대장이었던 오레스테스가 네포스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세운 경우였기 때문이다. 이 인물도 결국 용병대장 정권이었고 오도아케르도 그러했기 때문에 큰 차이는 사실 없었다. 게다가 당시 비잔틴 제국 내에도 반란이 끊이지 않던 혼란기였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으로서는 이를 참견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비잔틴 제국은 교묘한 조치를 취하는데, 직접 자신이 나서지 않고 동고트 족인 테오도릭Theodoric 대왕을 이용하여 오도아케르를 침공한 것이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황제 플라비우스 제논Flavius Zenon은 테오도릭을 집정관으로 임명하며 자신의 지지를 표명했고, 488년 테오도릭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입한다. 이손조, 밀라노, 아다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493년 테오도릭은 라벤나에서 오도아케르를 포위하여 결국 항복시킨다. 오도아케르는 항복 이후 곧바로 살해당한다. 테오도릭은 라벤나를 수도로 하는 동고트Ostrogoths 왕국을 건설하고 초대 왕으로 즉위, 전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를 선언했다. 테오도릭은 게르만인이었지만 8세 때 볼모로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져 비잔틴 제국에서 성장한 인물로, 군사적 능력도 탁월했지만 로마의 발전된 문물에 대한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친 로마적인 정책으로 전개되었는데, 그는 로마의 문화, 관습을 인정하고 국가는 오직 정치, 군사만을 장악하는 유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의 신망을 얻지는 못했는데, 당시 북부 게르만인들의 종교는 기독교이기는 했지만 아리우스 파에 속했고, 로마의 종교는 아타나시우스 파에 속해 있었다. 테오도릭 또한 아리우스 파를 지지했으며, 이는 테오도릭의 지역 장악력을 감소시킨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테오도릭 이후 동고트 왕국은 후계자 문제에 대한 권력 다툼에 시달린다. 테오도릭 사후 딸 아말라순타는 손자 아탈라릭을 왕으로 내세우고 섭정으로 등극했지만, 로마 문화를 지지했던 아말라순타와 기존 게르만 문화를 지지했던 고트족 귀족들 사이의 충돌 속에서 아탈라릭이 이른 나이에 사망한다. 534년 아탈라릭이 사망하자 아말라순타는 사촌 테오다하드와 함께 왕위에 올라 공동집권을 선언했으나, 테오다하드는 왕국 내의 반감을 이용하여 아말라순타를 토스카나 호수의 몰세나 섬에 유폐, 이후 살해했다. 이에 대해 아말라순타의 사위 비티기스Witigis는 다시 테오다하드를 살해, 왕으로 즉위했다. B. 비잔틴의 침공과 동고트 왕국의 몰락 테오도릭 당시에도 종교 분쟁으로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던 비잔틴 제국은, 뛰어난 군사 능력을 보유한 테오도릭 대왕이 죽고 후계자 문제가 심각해진 틈을 타서 1차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당시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대제는 아드리아 해안 쪽을 통해 장군 베리살리우스Belisalius의 군단을 투입, 동고트 토벌을 감행했다. 그는 재빨리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남부로 진입, 536년 나폴리를 회복하고 같은 해 로마까지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왕으로 추대된 비티기스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로마를 포위했으나 벨리살리우스의 진을 뚫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유스티니아누스는 베리살리우스에 대한 감시 목적으로 또다른 명장인 환관 나르세스Narses를 이탈리아에 파견했다. 이 둘 사이에 알력이 형성되었고, 원정은 점차 지지부진해져갔다. 결국 밀라노를 탈환했다가 다시 잃자 나르세스는 소환되었고, 베리살리우스는 540년 동고트 왕국의 수도 라벤나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동고트 족은 왕국 절반을 주겠다고 베리살리우스에게 제안했는데, 그는 이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상대를 안심시킨 후 라벤나를 점령하는 술책을 이용했다. 그러나 이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의심을 샀고, 결국 베리살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로 소환하면서 1차 이탈리아 원정은 종결되었다. 베리살리우스와의 싸움 과정에서 동고트 잔존 세력들이 발호하며 동고트 왕국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비티게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갔고 베리살리우스를 지원했던 일디바드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곧 조카 토틸라Totila에 의해 살해당했다. 토틸라는 동고트 왕국 재건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데, 그는 정복의 신속함은 물론 자비로움으로 유명했다. 기번은 그에 대해 "적과 친구를 불문하고 토틸라의 믿음과 자비에 기댄 사람 중 속은 사람은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세 차례에 걸쳐 로마 공격을 단행했고, 베리살리우스와 1승 1패의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다가 베리살리우스 소환 이후 로마를 점령했다. 여기서 그는 당시 로마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콜로세움에서 공연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콜로세움에서 열린 마지막 공연으로 기록된다. 그는 곧 코르시카, 사르데냐를 점령 후 시칠리아 점령 준비를 서둘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나르세스에게 2차 이탈리아 원정을 명했고, 당시 74세의 노장이었던 나르세스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타기나이 전투에서 토틸라를 괴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토틸라 이후 잔존 세력들이 테이아를 왕으로 옹립한 후 재차 충돌을 감행했지만,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테이아가 전사함으로써 그 또한 종결되었고 동고트는 완전히 멸망했다. 그는 이후 이탈리아 총독으로 이 지역을 관할하였으나, 주민의 지지를 얻지는 못하였다. 이탈리아는 이러한 오랜 격돌로 황폐화되었고 철저하게 파괴되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탈리아 내에서는 중세를 상징하는 봉건제Feudalism 체제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봉건제는 기본적으로 군신 관계에 있어서의 주종제, 장원과 농노제, 지방분권제로 상징되는데, 마크 블로크는 봉건제를 "정치적 권위가 붕괴된 상황 속에서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자신을 위탁하는 독특한 사회 체제"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봉건 체제는 탁신을 매개로 수립된 보호-종속 관계로서, 이에 따라 영주가 등장하게 되고 이 영주는 자신의 영지에서 마치 왕과 같은 절대적 권위를 발휘하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북부, 중부를 중심으로 이러한 봉건화 과정이 촉진되고 있었다. 2. 롬바르드 왕국 - 프랑크 왕국 전환기 고트 족의 남하는 타기나이 전투로 종결되었지만, 이번엔 게르만의 다른 분파인 롬바르드Lombard 족이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북부 이탈리아, 지금의 롬바르디아 지방에 롬바르드 왕국을 건설하고 세력 확장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비잔틴의 나르세스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들의 유입을 방조, 심지어 장려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그들은 세력을 점차 확장해나갔고, 한창 때는 이탈리아 전 반도 통합의 가능성까지 보이게 된다. 또한 통치 기간에 있어서도 100년 남짓한 동고트 왕국과 달리 200년 이상 이 지역에서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당시 교황은 롬바르드 족을 위혖적인 세력으로 간주했는데, 무엇보다 그들이 기독교 세력이기는 하나 아리우스 파였다는 게 문제였다. 특히 테오도릭과는 달리 그들은 로마 문명에 대해 무지한 편에 속했고, 그들과의 융화가 매우 어렵고 그들이 자신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프랑스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프랑크 왕국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이것이 교황에 의한 외세 개입의 최초 사례였다. 교황은 이탈리아 내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유럽 전체를 포괄하는 존재이며, 역사상 교황은 자신에 대한 위협 요소를 제거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그들이 경계하는 가장 큰 요소는 이탈리아 내, 즉 자신의 근처에 강한 정치 세력이 등장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들에 의해 교황에 대한 위협 행위가 감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 자신에게는 그리 강력한 군사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을 막기 위해 교황은 자신에게 더 멀리 있는 외세 정치 세력을 끌어들여 위협을 제거하는 방식을 자주 취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이후 1000년 이상 이탈리아 통일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한다. 이례적으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 체사레 보르자와 함께 역으로 자신이 통일 왕국을 이루는 것을 구상하였으나, 이는 교황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Merovinger 왕조의 클로비스Clovis에 의해 건국되었는데, 그 또한 게르만이었던 만큼 아리우스 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했으며, 지역적인 거리상에서도 롬바르드에 비해 교황으로서는 덜 위협적인 존재였다. 당시 왕은 카롤링거Caroilinger 왕조의 소 피핀Pepin the Short이었는데, 그는 메로빙거 왕조 말기의 중신으로 이베리아 반도 쪽으로 진입하던 이슬람 세력을 격퇴함으로써 프랑크 왕조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올라섰던 카를 마르텔의 아들이었다. 카를 마르텔이 죽자 피핀은 당시 왕 힐데리히 Ⅲ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로서는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입증해줄 요소가 필요했고 이에 교황과 손을 잡은 것이다. 그는 롬바르드 왕국과 격돌,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당장의 즉각적인 이해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로 복귀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고 공식적인 왕으로 인정을 받았고, 그 대신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교황에게 헌납하였다. 이것이 교황령의 최초였으며, 이를 통해 교황은 정신적 권위는 물론 이탈리아 지역 중북부를 지배하는 현실적, 세속적 군주로까지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피핀에 의해 획득한 땅이라는 것은 교황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어려웠고, 이 당시 등장한 문건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장의 위조였다. 이는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 교황에게 서로마의 통치 권한을 인계한다는 내용의 글로, 이에 따라 피핀은 단지 이에 대한 확인, 추인을 했을 뿐이란 주장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 로론초 발라Loronzo Valla에 의해 위조 사실이 증명, 부정되었으나, 이후 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위조, 지금 생각하는 불법적 요소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우리는 역사를 포함한 모든 것이 "객관적, 사실적이어야 하며 엄밀한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는 르네상스 이후, 근대적 사관으로 등장한 개념이며 당시에는 이때와 사고관 자체에서 차이가 있었다. 중세적 사고관은 이와는 크게 차이가 있는데, 이는 필연론의 측면이 강하다. 그들은 "마땅히 그랬을 것이다"라고 자신이 믿는다면 위조 등의 행위에 대해서도 문제 의식이 없었다. 즉 그들에 대한 윤리적 비난을 할 것이 아니라, 당시 사고 체계의 문제에 대해 되짚어봐야만 이 정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3. 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의 등장은 이미 예전에 이뤄졌지만,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 휘하에서 또다른 형태로 진화한다. 그 인물이 일명 샤를마뉴Charles Magnue로 불리는 카롤루스Karlolus 대제(주 : 본래 한국에서는 샤를마뉴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이 인물은 프랑스는 물론 전역에 길쳐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에 원어 표기가 매우 애매하여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에 따라 이 인물에 대한 표기는 라틴어 표기인 카롤로스로 하도록 한다)이다. 그는 소 피핀의 아들이었는데, 프랑스-독일-이탈리아-헝가리-에스파냐 북부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게르만의 전성 시대를 이끌어냈다. 이는 그의 시대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등자, 즉 안장의 발걸이의 힘이 컸는데, 이는 말을 타는 것을 쉽게 하고 마상 위에서도 두 손을 자유롭게 하여 우리가 잘 아는 중세 기사의 출현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이러한 유럽의 정치적 통일 달성 후 교황과 손을 잡는데, 이는 그가 당시 교황 레오 Ⅲ세에게 서로마 황제직을 받으며 대관식을 치르는 것으로 정점에 이른다.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 다시금 부활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영예 대신 기존 아리우스 파, 그노시즘 세력 등 수많은 종파로 분열되어 있던 당시 유럽 교회들을 강력한 정치적 역량 하에 로마 카톨릭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서로마 제국은 얼마 가지 못했는데, 프랑크 족의 전통상 아들들은 분할 상속받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제국 프랑크 제국은 삼분되었고, 이는 이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이중 단연 가장 중요한 지역은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에는 종교적 상징인 교황이 자리잡은 땅이었고 동시에 로마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지닌 지역이 존재하는 땅이었다. 이에 따라 장자였던 로타리오 Ⅰ세가 우선 이탈리아 지역과 서로마 황제위를 같이 상속받기는 하였으나 이 황제위와 로마라는 땅 때문에 이 지역은 계속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프랑스와 독일 지역과는 달리 수많은 이들이 제위를 놓고 서로가 이탈리아 왕이라고 다투는 모습이 연출되었고, 이는 이탈리아 내의 사실상의 정치적 공백 상태를 야기하게 되었다. Ⅱ. 신성로마제국의 등장 1. 오토 대제 이러한 이탈리아 혼란의 종결은 약간은 엉뚱하지만 독일에서 나타났다. 독일, 당시의 동프랑크는 자신들의 왕에 대해 선출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나, 이례적으로 세습 군주인 오토Otto 대제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그의 아버지였던 작센 공 하인리히 ⅰ세가 절도 있는 태도와 슬라브, 헝가리, 데인족 등의 침입을 계속 방어함으로써 인기를 끌었고, 특히 자신의 본령이었던 작센의 발전에 힘쓰고 지방제후들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않았던 점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그는 동 프랑크 내의 통일 정권 수립을 위해 암약했는데, 오토 대제는 이러한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동 프랑크의 국가 통일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최초 그의 정책은 제후들의 분립주의 노선에 대해 대항, 왕족을 대공과 왕령백으로 임명하여 국가 통합을 꾀하였으나, 이에 대해 제후들은 오토의 아들 루돌프를 옹립하여 반란을 획책, 정책이 좌절되었다. 이 배후에는 서프랑크의 루이 Ⅳ세의 원조가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단순히 부족들의 통합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 초부족적 성향을 지닌 교회 세력과의 동맹을 시도했다. 그는 독일의 주교, 대수도원장을 왕권의 보좌역으로 삼고 교회령, 관구를 국가 체계에 끌어들이는 방식의 제국교회정책을 펼쳤다. 이는 이후 서임권 분쟁을 불러오게 되는 시발점이었으나, 그는 이러한 정책을 통해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평을 얻는 부가적인 효과 또한 얻게 되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 원정을 시도, 당시 이탈리아 왕이었던 로타리오 Ⅱ세의 딸 비아델하이트를 비로 삼고 대립세력이었던 베렌가리오 Ⅱ세를 토벌하여 이탈리아 왕위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 당시 그는 교황 아가페투스 ⅱ세에게 황제 대관을 타진하였으나 거부당했다. 그러나 이후 교황 요한 XII세의 요청에 따라 다시 이탈리아로 출정, 결국 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는 데에 성공했다. 이것이 신성로마 제국의 탄생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중세가 당시 어떠한 사고를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인데,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로마 제국 내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에 대한 향수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고, 이 로마라는 이름은 여전히 강력한 후광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동시에 여기 붙은 신성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는 단순히 기존의 로마가 아니라 기독교라는 신성과 합치된 절대적인 이상향의 존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도대체 신성하지도, 로마스럽지도, 제국 같지도 않다"라고 평가한 것처럼, 이 신성로마제국은 거의 이름뿐인 유명무실한 존재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이미지라는 것을 무시하는 것 또한 옳지 않은 행위로, 실제로 이후 황제들은 이러한 유명무실한 황제권을 세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으며 특히 로마를 제국 내에 포함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거듭했다. 2. 서임권 투쟁 : 카노사의 굴욕 A. 카노사의 굴욕 일반적으로 카노사의 굴욕 사건에 대해 교황권의 정점이라는 측면으로 알려져 있는 측면이 강한데, 정작 카노사의 굴욕 사건 전체를 보게 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 사건은 교황권과 황제권이 격렬하게 대립한 사건으로, 이 사건에서 교황권도 황제권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교황권과 황제권의 세력 다툼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카노사의 굴욕 사건은 이 둘이 가장 비슷한 힘으로 충돌한 교착점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어쨌건 카노사의 굴욕은 성직자 서임권을 둘러싼 황제, 교황 간의 가장 격렬했던 충돌 사건으로,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중세 시대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였다. 카노사의 굴욕 사건의 시작은 교황 그레고리우스Gregorius Ⅶ세였다. 그는 당시 1000년이 지났음에도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에 따른 혼란한 정세에 대해, 강력한 개혁을 계속 추구해나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존에 성직자 서임권이 세속 군주에게도 부여되어 있었던 것에 대해 세속 군주의 서임 규정을 강화하여 교황권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성직자 규율을 확립시키고자 했다. 그는 특히 성직자가 아닌 속인에 대한 주교 서임권에 대해 언급하며 황제의 서임권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제 또한 가만 있을 수 없었는데, 속인에 대한 주교 서임은 그들을 자신의 보좌직으로 끌어올리고 황제권을 굳건히 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였다. 이에 따라 황제 하인리히 Ⅳ세는 보름스 교회 회의에서 교황에 대한 폐위를 결의한다. 당연히 교황으로서는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고, 그는 로마 회의에서 황제의 파문 및 폐위를 결의한다. 서로 상대를 폐위시켜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크게 작용한 것이 파문인데, 파문은 카톨릭 사회에서의 사실상 추방 명령으로 이는 황제의 권위를 크게 손상시켰다. 하지만 사실 하인리히 Ⅳ세는 파문이나 폐위 따위에는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문제는 독일 내부에 있었다. 분립주의 노선을 여전히 견지하며 독일 통일을 목표로 하던 하인리히에 대해 반항적 성향이 강했던 당시 독일 제후들은 마치 기회라도 맞은 듯 이를 크게 환영했다. 이에 따라 독일 전역에 걸쳐 대규모의 반항, 반란이 야기됨으로써, 이를 그저 무시해버리려던 하인리히로서는 큰 곤욕을 치를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독일 제후들은 교황과 손을 잡고 교황 주관 하에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신황제를 선출하고자 했고, 이렇게 되면 명분 싸움에서까지 밀려버리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힘에서도 위험한 상황에서 명분까지 밀려버리면 하인리히가 설 자리가 아예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교황은 로마에서 아우구스부르크로 황제 선출을 위해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온천이 있는 카노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황제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교황을 만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카노사로 달려가 교황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당연히 거절당했고, 그는 겨울의 추운 날씨 속에서 맨발로 3일간 애걸했다. 이것이 바로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불리는 장면이었다. 물론 그레고리우스는 이에 대해서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사제는 참회하는 이에 대해서는 죄를 사해줄 의무가 존재했다. 결국 이 의무에 따라 교황은 자의반 타의반에 의해 황제의 파문을 해지하고 로마로 복귀한다. B. 반군 진압 독일 제후들로서는 황당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교황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더니 난데없이 교황이 파문을 해지하고 돌아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독일 제후들은 멋대로 신황제로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선출한 후 황제군에 대항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명분을 잃은 상황에서 제후 상당수가 다시 황제에게로 귀속되었고, 황제군은 베르센부르크 전투를 승리하고 3년간 반란군을 진압하여 그들을 완전히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교황은 초기에 이 전쟁에 대해 계속 고심하였으나, 결국 다루기 힘든 하인리히보다는 반란군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고 반란군 측의 속을 들어주었다. 그는 1080년 황제를 재파문했고, 지원을 약속하는 전령을 반란군 측에 파견했다. 그러나 이 전령이 가던 중에 이미 반란군이 패배해버렸고, 왕으로 추대되었던 루돌프는 전사했다. 반대파를 제거한 하인리히로서는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고, 교황이 그런 전령을 보냈다는 것을 빌미로 하여 로마에 대한 진군을 시작해 단번에 로마를 점령해 버린다. 그는 파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교황은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교황의 주 도피처였던 산탄젤로Saint' Angelo 성으로 대피한 후, 자신의 지지자였던 남부 노르만 기사들에게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노르만 기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하인리히는 먼저 철수해버렸고, 할일을 잃은 노르만 기사들의 로마 약탈이 발생했다. 이에 노르만 기사들을 불러온 교황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안 좋아졌고, 결국 교황은 노르만 기사들과 함께 시칠리아의 살레르모로 도망친다. 결국 교황은 이러한 유람 도중 병을 얻어 사망했다. 그러나 황제 역시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에 대한 파문은 여전히 해지되지 않았고, 이후에도 국가 전역에서 나타나는 만성적인 반란으로 속을 썩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반란으로는 자신의 장남이었던 콘라드Konrad가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는 진압에 성공하였으나, 차남 하인리히 Ⅴ세의 반란 때는 결국 패하고 감금되었다가 뤼튀히로 도망쳤다. 그는 여기서 재기를 도모하고 비제 근처에서 한 차례 하인리히 Ⅴ세의 군대를 무찌르는 것에 성공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급사했다. 그는 콘라드 반란 이후 파문 해지의 필요성을 느껴 파문 해지시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겠다는 선언까지 실시했으나, 결국 교회와의 화해는 실패했다. C. 카노사 굴욕의 의의 카노사 굴욕은 단순히 황제가 굴욕당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는 오히려 황제가 개인적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치적 유리성을 확보한 사건이었다. 그는 파문이라고 하는, 시기적 적절성과 맞물려 교황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카드패를 맨발로 겨울에 서 있는 퍼포먼스를 통해 뺏어버린 것이었다. 재파문이 이뤄지기는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고, 결국 교황은 로마에서 밀려나 떠돌다가 죽는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 역시 이후 만성적 반란으로 속을 썩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 싸움은 누가 승리했다고 말하기 매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적어도 독일, 이탈리아 지역에 있어 호족-영주 세력의 할거 가능성을 야기했다. 이러한 지방 할거주의는 봉건화를 더욱 급속하게 초래하였으며, 이후 독일, 이탈리아 지역이 정치적 통합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그들의 완전한 통일은 19세기 민족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하지만 이러한 속에서도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유능한 황제 등장시에는 여전히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잔존하고 있었고, 실제로 수많은 황제들이 이러한 통합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참고로 신성로마제국의 제위 결정 방식은 선출식으로, 7명의 유력한 제후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이들은 일종의 불문율로 너무 잘나거나 못난 인물은 뽑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자유권을 계속해서 보존하고자 했다. 그러나 기존 군주가 유능, 강력할 시에는 제후권이 약화되면서 세습되는 경우도 꽤 자주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대가 지난 후에는 에스파냐-오스트리아를 포괄하는 강력한 왕가였던 합스부르크 왕가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들의 경우 이를 계속 세습 계승하기도 한다. 3. 황제들의 마지막 시도 - 슈타우펜 왕조 시대가 흘러 12C 중반, 다시 한번 이탈리아에 대한 통합 시도가 본격화된다.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fredrich Balbarossa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Ⅰ세의 등장이었다. 그는 독일 제후들의 불복종과 반항을 모두 제압, 국내 치안을 완결한 후 6차례에 걸친 이탈리아 ㅈㅇ복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는 이후 역사가들에게 무장으로서의 자질, 뛰어난 용병술, 훌륭한 인재등용으로 칭송되었던 인물이었고, 특히 궁정기사 문화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황제 전설 속의 영웅으로 계속 노래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강력한 상대를 맞이한 것은 당시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주도의 도시 동맹이었던 롬바르디아 도시 동맹이었다. 이들의 갈등은 꽤나 오래간 지속되었으나, 예상을 깨고 레냐노 전투에서 발바로사가 패배하면서 이탈리아 정복은 1차로 좌절되었다. 그들은 화의를 맺었고, 이 과정에서 도시 동맹은 황제에 대한 자치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대해 교황 그레고리우스 Ⅷ세는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롬바르디아 도시 동맹을 위험 요소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에 대해 발바로사와 동맹을 체결, 이 도시 동맹을 파괴하기 위한 공작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3차 십자군 전쟁을 권유한다. 발바로사는 이에 대해 찬성하고 준비가 끝나자 바로 투르크 지역으로 떠났으나, 사레프 강에서 급사했다. 이에 대해 정설은 깨끗한 물을 보고 목욕을 하러 들어갔던 발바로사가 발을 잘못 디뎌 익사했다는 것이나, 마키아벨리는 목욕 후에 추운 날씨 때문에 독감에 걸려 사망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어쨋건 발바로사가 사망함으로써 정치적 위협은 종결되었고, 통합 가능성도 1차적으로 종결되었다. 발바로사의 아들 하인리히 Ⅵ세는 그렇게 강력한 정책을 시행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의 왕위 계승자였던 콘스탄차Konstanza와 결혼함으로써 이탈리아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했다. 당시 콘스탄차는 아이를 낳기에는 나이가 꽤 많았고, 초기 이들의 연합에 대해 우려했던 교황 또한 6년간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걸 보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임신했고, 이에 대해 의심 여론이 커지자 이를 막기 위해 공개 석상에서 아이를 출생했다. 이 인물이 바로 프리드리히 Ⅱ세였다. 당연히 프리드리히에게는 독일 지역과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지역에 대한 세습권이 주어졌고, 이는 교황에게 큰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그러나 하인리히가 급사하고 지방 세력의 반란이 심화되면서 콘스탄차와 프리드리히의 생사마저 위급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콘스탄차는 당시 교황인 인노센티우스Innocentius Ⅲ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 과정에서 교황은 로마냐, 마르크안노나 지역을 교황령에 합병하는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콘스탄차는 당장의 정치적 위협은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발바로사 이후 계속 쇠퇴 기로에 있었던 교황권이 재성장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프리드리히 즉위 이후 그가 교황과 계속 충돌하는 과정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프리드리히 Ⅱ세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즉위하였는데, 이 인물은 콘스탄차의 아들로 시칠리아 출신이었고 그만큼 이탈리아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 또한 군사적, 정치적 능력에 있어 천재적이었고, 7-8개 국어에 능통하고 학예를 보호했으며 그 자신 또한 시인이기도 하였던 만능인이었다. 그 역시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합을 추구했고, 특히 그가 이탈리아에 대한 애정이 강했기에 이탈리아는 다시금 제국 중심화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구 과정에서 그는 교황에 의해 세번이나 파문당하기도 했다. 특히 그가 이뤄낸 가장 큰 사건은 제 6차 십자군이었는데, 그는 군사적인 수단이 아니라 외교적 수단을 통해 예루살렘을 평화롭게 점거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다시금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의 인식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슬람에 대한 평화적 태도가 이단이라 하여 극렬한 비난을 받았다. 어쨌건 그는 십자군 문제와 롬바르디아 정책 등 여러가지 면에서 교황과 계속 충돌했고, 1250년 그가 급사함에 따라 이탈리아의 통합 가능성은 다시 한번 좌절되었다. 이후 프리드리히의 사생아 출신이었던 만프레드Manfred는 아버지의 유업 달성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였으나, 교황 인노센티우스 Ⅳ세는 프랑스 왕 루이 Ⅸ세의 동생이었던 앙주 공 샤를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교황의 외세 끌어들이기 방식은 이탈리아 중세사, 근대사에 있어 일종의 법칙화된 감이 강하고, 결국 로마 교황의 존재는 이탈리아 정치적 분열을 영속화하는 데 상당 부분 공헌한 면이 있다. 어쨌건 프랑스 군은 이탈리아로 진격하였고,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만프레드의 독일 제국군을 격파함으로써 이는 종결되었다. 그리고 2년 후 16세에 불과했던 만프레드의 조카 콘라딘Konradin이 제후들에 의해 옹립되어 프랑스와 다시 한번 충돌하였으나, 타랴코초 전투에서 독일군이 다시금 패배하고 콘라딘이 체포 후 처형됨으로써 통일 가능성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Ⅲ. 결론 이탈리아는 로마 멸망 이후 극심한 혼란기를 겪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혼란했던 기간은 고트-롬바르드 시대로 상징되는 범람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프랑크 왕국의 등장은 이러한 위기를 넘기는 기회로 작용하였고, 유럽 세계는 카롤루스 대제 휘하에서 다시금 제국으로의 성장을 맞을 뻔한다. 이 와중에서 가장 기민하게 움직인 인물은 누구보다도 교황일 것이며, 무엇보다 프랑크 왕국의 가장 큰 의의라면 교황과 손을 잡고 유럽 교회를 통일시킨 부분이 아닐까 한다. 이는 이후 1000년 이상 카톨릭이 지배하는 중세 시대의 개막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황과 세속 군주가 손을 잡고 신성로마제국이 등장하면서 다시금 부각된 것은, 두 군주의 충돌 관계였다. 적이 있을 때는 뭉칠 수 있었으나 적이 사라진 이후에는 결국 자신들끼리 적으로 돌아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로마였다. 신성로마제국의 이탈리아 정책은 항상 로마의 획득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들의 기반은 독일-오스트리아 지역이었지만, 그들의 이상은 항상 이탈리아, 로마로 향해 있었다. 이러한 관념은 이후 역사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났으며, 이것은 제국과 종교가 계속해서 대립한 가장 큰 이유였다. 더더구나 당시 중북부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서, 이 지역은 현실적인 가치마저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이 시대에서 유념해야 하는 것은 로마의 영광에 대한 향수였고, 황제와 교황의 다툼도 여기에 기반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성이 있다. 동시에 약간은 곁다리로 하여, 당시 교황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펴보고 이후 역사에 있어 이것이 어떤 식으로 계속 전개되어 나갔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교황과 세속 군주라는 두 칼의 싸움은 중세 시대 전반에 걸쳐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중세 시대를 파악하는 것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포르 에 몬테 프로푸고. 라시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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